아래의 사진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본 삼양라면이다.
국민학교 5?6학년때인가? 국내 최초 출시된 라면(10원)을 처음으로 먹었다. 국내에 처음나온 라면은
값이 저렴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아무때나 아무렇지 않게 막 먹을수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당시 어느집이나 마찬가지로 대가족이었지! 식구수대로 라면을 끓일수도 없어서 어머니는 라면에 국수를
섞어서 상에 올려놓았다. 얼마전 탈북자가 말한것처럼 한국에 정착후 한달간을 라면만 싫컷 먹었다고 한것처럼,
그당시 처음먹는 라면의 맛은 진짜 환상적이었다. 비록 국수를 섞은 라면이었지만 , 나는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수도국산박물관에서 본 라면은 내용물까지 들어있어, 40여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맛은 변함이 없을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은 간편하게 먹을수 있는 라면 이지만 초기에는 쉽게 먹을수 있는 간편한 음식이 아니었다는거..모르는 사람이 많으리라.
그후로 라면 .참 많이 먹었다. 특히 쫄병때 군대에서 일요일 점심에 먹는 라면(1인당 2개분량)맛은 일품이다.. 70년대 군대생활.
환자가 생기면 라면을 끓여먹이곤 했다. 환자 특별食이다. 72년도 여름방학때 먹은 라면맛은 영원히 잊지못한다. 친구2명과 함께 셋이서
서울역서 기차타고,... 목포서 배타고 흑산도 넘어 홍도에 갔다. 배안에서 서울교대 여대생 둘을 만나 합류했다.
홍도에서 3일동안 있는돈 거덜났다.
여자들 앞인데 구차하게 이것저것 가려야 쓰것는가? 쫌시럽게. 목포에서 배를 탈때 보니 젊은 사람들은 우리들뿐..
그때 홍도에서 캠프파이어하고 놀았던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었으니. 철없었던 시절의 얘기다. 홍도에서는 물론 라면 한끼도 먹지 않았다.
여행을 기획한것도,돈을 사용하는것도 모두 내가 맡아서 하였다.
그런데 이놈들, 서울교대 학생들이랑 다니느라고 밥하기는 커녕..나는 식사때마다 여기 저기를 찾아 다녔다. 밥먹으라고.
이틀후, 홍도에서 10시간을 배타고, (그당시에는 목포-홍도간 운항시간이 10시간으로 기억됨) 목포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 되었다.
목포 도착시간이 너무 늦어 여관에서 하루 묵기로 하였다. 방1개를 얻어, 가운데 빨랫줄을 걸고 그위에 모포를 올리니 양쪽에서 보이지 않는
장막이 생겼다. 친구녀석 둘은 밤새 뒤척이는지 못자는것 같았다. 두놈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녀석들의 침넘어가는 소리가 가끔 들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그밤은 무사히 지나간것 같다(나는 밤새 자느라고 잘모르니)
짜식들~ 잡생각 하지말고 편하게 마음비우고 나처럼 잠이나 잘것이지...
서울교대생들은, 대둔산을 다녀온후 홍도가 마지막 코스여서 서울로 가기로 하였고
여대생 둘중 한명에게 눈꺼풀이 뒤집힌 우리 친구 상규는 그녀들 따라서 같이 서울로 가버렸다.
목포에 아는집이(보해소주 공장장)있다는 태규의 말에 그리로 가서 하루를 묵고 약간의 교통비만 얻어 무주구천동에 갔다.
가진돈이 워낙 모자라 3일동안 라면을 먹었더니 입에서 밀가루 냄새가 난다.
옆텐트의 여자들이, 불쌍해 보였던지 식사때 초대 해줘서 밥도 얻어먹었다.
구천동은 요즘도 한여름에 추운가? 계곡 물가에 텐트 를 치고 야영하는데, 한여름인데도 밤에는 추워서 못잔다.
텐트 바로옆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운치가 있기는 한데,너무 춥다.
자기전에, 큰돌을 불에 달궈서 모포로 감싸 발밑에 놓고서야 잠을 잤다.(유담프 처럼)
계곡물은 또 어찌나 차갑던지 조금만 발을 담그고 있으면 발이--- 꽁꽁꽁.
캠핑을 끝내고 집에 도착하니 새까매진 얼굴에 비쩍마른 얼굴을 보고 고생이 많았냐고...
정말, 고생많았다. 지겹게 라면 먹느라고...
라면 상식 몇가지. ** 라면은 냄비에 찬물넣고 라면 넣고 바로 끓여도 된다. 끓는물에 집어넣지 않아도 라면맛은 변함없다.
** 라면껍질 귀찮지? 라면 봉지를 스프봉지속에 접어서 집어넣으면 쏙 들어가서 부피가 줄어든다
라면에 참치(캔)를 넣어서 끓이면 라면맛이 진해지고 맛있다.
오늘 점심 라면으로 때웠다. 갑자기 라면이 머고 싶어져서.
라면을 개발한 일본인이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음식을 만들어 죄책감이 든다"고 하니... 가끔씩만...
홍도행 배 갑판에서.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은 날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천상, 패잔병?
저멀리 보이는 육지가 가까워오면서 롤링이 심하여 갑판위에는 난리블루스.
답답해서 갑판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오물이 바닷바람에 의해 여기 저기로 날아다닌다.
햐 ! 경치좋은 홍도에서의 우리 일행모두 단체사진 팍.
이아가씨 아니 여대생들 지금은 어디서 뭐하는지?
글쓰고 보니 정말 궁금하네...
이 글 봤으면 연락좀 하라구...
캠핑 다녀와서도 한동안 만나고 했었는데...
홍도에서 나룻배를 하루 전세내어 어허야 디야~ 유리알처럼 맑던 홍도 바다밑을 보며 즐겁고 풍요로운 한때.
당시 홍도에서 돈을 주고 산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붉은색 돌로된 작은 목걸이 펜던트의 앞 뒷면. 지금까지 40년가까이 함께하고 있다.
지금도 컴퓨터 책상앞에 걸려있다. 너와 나는 참으로 끈질긴 인연이다. 붉은색 돌(紅돌->홍돌->홍도). 이걸보면 홍도를 생각하며 미소짓는다.
홍도에서 목포로 온후 친구 상규와 서울교대생들은 서울로 올라갔고. 태규와 둘이서 무주구천동으로...
구천동 백련사 입구에서 등산하기전, 밥얻어먹던 옆텐트의 처자들과.
가운데 남자는 우리가 구천동에서 텐트를 치고나서 쉴때 불쑥 찾아온 불청객,
중앙대 경제학과에 재학중인데 친구와 같이 오려다 친구가 약속을 어겨서 혼자왔노라고...
하룻밤만 텐트에서 같이 지낼수 있냐고... 어허 이것 참. ...
우리텐트에는 일제 카메라와 그당시 귀했던 소니 카세트라디오 등 귀중물품이 있었는데.
사연을 듣고 보니 같은 학생으로서 거절할수없어 하룻밤을 재워주었던 친구.
머리가 장발도 아니고 범생이같아서...
물론 그친구도 같이 라면 먹었지.
이사진은 알려준 주소로 보내주었다.
저 복장에 운동화 구두신고 덕유산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왔으니.. 요즘 같으면, 등산복에 등산화 하며
땀닦는 수건에 배당까지 메고 갈텐데.. 참으로 대단한 인생들이다.
헌데 그시절엔 등산복이 있을리 없지. 남들도 그렇게들 다녔으니까..
처자들의 다리에는 등산을 위한 스타킹 착용.당시의 등산복장이다.
같이 학교다녔고 여행다녔던 오른쪽 끝의, 친구 태규. 이사진들을 보면 아쉽고 생각이 난다.
군제대후에도 계속 만났는데 홍도보다 멀고 먼 영원히 만날수 없는곳으로 태규는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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