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중 대열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이대열이라 2:10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교 졸업후 대학은 서울의 다른학교에 다녔지만, 가끔 만났고, 졸업후에는 대열이와 나의 직장이
우연치않게 안양이라 퇴근시에는 가끔 만나기도 했다.
고등학교시절, 獨子인 대열이는 인천에서 자취를 하였다. 주안의 인천공고앞에 사는 정xx이라는 친구(군에서 작고)와 셋이서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대열이가 김포 (경기도 김포읍 풍무리) 에서 담근 4홉 동동주를 , 주안사는 친구는 2홉포도주를 가져와
대열이의 자취반에서 셋이 나눠마셨다. 처음 마셔본 동동주였다.
안주는 생뚱맞게 젤리. 처음보는 동동주에 떠있는 하얀쌀의 유혹에 끌려 저녁도 안먹은채, 공복에 먹은 동동주와 포도주는...
집에 와서 한참을 토했다.
고교시절 김포에 두세번을 놀러갔다. 대열이의 집은 풍무리. 동네에는 인가가 거의 없었고, 집앞에는 너른 밭이 끝이 없이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밭을 보니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가 하얗게 떨어져있다. 삐라는 주워서 경찰서에 갖다 준다고 했다.
집 뒤에는 장릉 (이조 선조의 5째 아들이고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무덤) 이 있다고 했다.
중학교때 장릉으로 소풍 간적이 있는데 그당시에는 대열이를 알지 못했다.
인천에서 풍무리 가는 버스는 개건너를 건너면서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에서 내뿜는 먼지와 더불어, 심하게 요동치는 진동으로
버스 천장에 머리가 닿을만큼 들썩 거렸다.
그래도 풍무리를 갈때는 일부러 버스의 뒷좌석에 앉아, 비포장도로의 덜그럭 거리는 느낌을 즐기면서 갔다.
대학 2학년쯤. 여름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김포 대열이의 집에 갔다. 대열이의 풍무리 집에는 전화가 없어 무작정 연락도 없이 가는것이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천장까지 튀어오르는 버스를 타고, 약1시간쯤 가면 장기리를 지나 곧 풍무리에 닿는다.
도착하여 대열이를 부르니 대열이 아버지가 나오셨다. 대열이는 서울에 가서 집에 없다고 안으로 들어오란다.
대열이의 아버지는 그때뵌 기억으로도 할아버지 처럼 연로 하셨다.아들이 없어 늦둥이를 본게 대열이였던 같다.
날도 더운데 멀리서 오느라고 힘들었을텐데, 목을 축이라고 유리컵에 미숫가루를 타서 부엌에서 손수 들고 오셨다.
한입을 마시면서 목으로 넘기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얼굴을 찡그릴수도, 입속에 있는것을 뱉을수도 없었다. 대열의 아버지가 바로 앞에 계시는데...
미숫가루에 넣은 것은 설탕이 아니라 조미료(미원이나, 미풍)였다.
연로하신 친구의 아버지가 미원을 설탕으로 잘못 알고 넣으셨던 것이다. 설탕이나 미원이나 겉으로 보기에 색깔이 같으니...
아버지의 정성때문에 찡그리지 않고 나는 한컵을 몽땅 마셨다. 속에서 느끼함을 참으면서...
그후에 대열이를 만났어도 미안해할까봐 미숫가루 애기는 하지 않았다. 작년, 수십년만에 차창밖으로 지나친 풍무동은 거대한 도시로 변해버렸다.
옛날의 시원스럽고 넓은 평야는 간곳없고, 괴물처럼 변한 그곳을 보며 문득 대열이의 아버지가 생각낫다.
대열이는 D자동차 영업소장을 끝으로 ..오래전부터 고향에서 아직도 부동산을 하고 있을것 같은데(10년전인가 부동산을 한다고..)...
옛날. 쌀하면 김포, 이천쌀 일정도로 김포는 쌀의 생산지로 유명했었다.
60년대 김포 사진. [한국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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