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추운 겨울. 마땅히 놀만한게 없다.
[80년대로 추정되는 제물포역]
제물포역에서 개구멍을 통해 기차를 타고 주안역에서 내려, 역 뒷쪽의 논에서 썰매를 타거나, 아니면 주안역 뒤 논바닥의 작은 둠벙을 찾아
도끼로 얼음을 깨어 붕어,미꾸라지를 잡거나..깡통에 구멍을 뚫어 작은 나무개비를 주워 넣어 불을 피우는(쥐불놀이)깡통 돌리기외, 할만한 놀이가 없었다.
당시 주안역은 나무판자에 검은칠을 하여 보기에도 우중충하였고, 내부는 두어평정도밖에 안되는 허름한곳. 겨울에 들어가본 역사의 가운데에는 난로가.
주안역에서 내리다 붙잡혀 역사에 들어가 청소도 해봤다.
[60년대초 사진으로 추정. 사진의 오른쪽 끝이 부처산--공설운동장 쪽에서 숭의육교(철도)를 배경으로 찍은사진.가운데 가로 긴선이 경인선 철로.
왼쪽끝 못미쳐 전봇대 아래에 사람3명이 철로뚝에 앉아있다]
[현재의, 부처산 올라가던 길]
부처산 정상 입구
[ 현재의 부처산 정상-선인중 교정]
선인 학원 건물이 들어서면서..지금은 산의 윤곽조차 찾아볼수 없다.
부처산 꼭대기는 바람이 잘불어 연날리기에 최고였다.
국민학교 저학년때는 가오리연을, 고학년 어느때인가 옆동네 상희형을 알게 되어 시가꾸 연(사각--四角 연을 일본어로 발음. 당시에는 방패연을 시가꾸 연이라 불렀다) .
상희형은 방패연도 잘날리거니와 만들기도 잘했고 방패연에 대하여 모르는게 없었다.
그당시 상희형은 중학교1(?)2(?)였는데, 벌써부터 여자친구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또래보다 조숙했던것 같다.
깨진 사기그릇을, 곱게 빻은후 찹쌀풀과 섞어, 이 사이로 양사(洋絲---가늘지만 잘끊어지지않아 당시 재봉질에 많이 사용함) 를 통과시킨후 말리면 무적의 연줄이 되는것도 상희형과 같이 만들면서 배웠다.. 상희형은 이를 실에 개미먹인다고 했다.
제대로된 얼레가 없어, 손재주 뛰어난 작은아버지께 부탁하여 멋진 얼레도.
부처산 꼭대기에는 겨울이면 항상 연날리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이곳에는 산소가 몇기 있었는데, 어떤 아이들은 남들보다 높이 연을 날리려고 산소 봉분위에서.. 또는 비석에 올라서서 날리기도 했다.
방패연은 줄을 감다가 재빨리 얼레를 거꾸로 내리면 공중으로 높이 오르던 연이 아래로 곤두박질 치면서 쭉 내려오다 잠시후 바로 서는 묘기를 보인다.
물론 나도 이기술을 배워 멋지게 써먹곤했다.
상희형은 이 묘기를 '튀각'이라고 하면서, 자주 묘기를 보였는데 이광경을 보는 주위의 아이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현재의 부처산. 부처산의 모습은 볼수 없고 아파트,건물에 가려져 있어 이곳이 산 이었다는 윤곽도 알아보기 어렵다.
연날리기, 출처: 한국대관
사기가루를 먹인 연줄은 다른아이의 연줄과 닿으면 보기좋게 끊어버렸다.
여럿이 연을 날리다보면 자연적으로 연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게 개미 먹인 연줄이다.
사기가루에 한번 골탕먹은 아이들은, 사기가루 먹였다 싶은 연에는 접근을 피하곤 했다.
몇년전 겨울. 작은 녀석을 데리고 선포산에서 연을 날렸다.
선포산의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서 연줄이 끊어져 날아가 버렸다. 아마, 양사가 아닌 힘없는 바느질실로 해서 그런지...
연이 날아가서 아깝기도 했지만, 옛부터 대보름에 연을 멀리 날려보내므로서 한해의 액운을 날려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차라리 날아간게 잘된것이라고 생각하고 내려왔다.
요즘 아이들은 연을 모른다. 그래서 풍속도 모른다. 그리고 연날리는 즐거움도 모른다.
추운 겨울날, 푸른 하늘만 보면 지금도 연을 띄우고 싶다.
지난 겨울 명마주유소 맞은편 버스정류소에 붙어있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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