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자동차 매매계약서가 생각나서...
아버지께서는 69년도에 합승(마이크로 버스)을 구입하셨다.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부업. 요즘으로 치면 투잡을 하신것이다.
천의여객. 경기 영 5-5694. 인천은 경기도에 속했으므로.
지금도 1년에 두세번씩 성묘를 가려면 당진의 천의를 지나야하는데 이곳을 지날때마다 옛날의 합승생각이 난다.
운수회사의 대표가 당진의 천의사람이라는 말을 들은것 같다.
아래는 아버지가 구입한 합승의 매매계약서로, 매매대금 107만원. 당시 합승요금이 68년도에10원. 70년도에 15원인것으로
계산해보니 합승의 매매대금은 요즘의 1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주소,성명등 인적사항은 지웠다.
그시기의 대중교통은 시발택시와 합승(마이크로버스),전차가 전부였다.(대형버스는 그후에...)
출퇴근시 조수와 차장이 손님을 그야말로 짐짝처럼 꽉꽉 싣느라고 개문발차는 예사였고.
손님이 전부 타면 문에 가까스로 매달린 차장은,문짝을 탕탕 두드리며 오라잇! 하고, 정류장에서는 스톱! 소리치고 또 문짝을 두드렸다.
1960년대 합승.[자료출처:한국대관]
기억이 희미해서 정확치는 않은데, 하루는 조수 (남자 안내양을 조수라고 불렀다. 조수는 차량 고장시 운전수의 보조 역할도 하였다).
하루는 차장 (여자 안내양)이 번갈아 가면서 교대근무를 한것으로 기억된다.
아다리가 맞았는지 차장의 가방이 불룩하다
차장(요즘으로 치면 안내양) 자료출처:http://ask.nate.com/popup/print_qna.html?n=8956247
겨울이 오기전,고생하는 차장들에게는 정부에서 방한용 옷을 선물하기도 했다. 사진은 서울시장 양택식.
자료출처:http://h21.hani.co.kr/section-021014000/2006/02/021014000200602070596028.html
1961년도부터 시작된 차장제도는 1988년 김포교통을 마지막으로 볼수 없게 되었다.
60년대말 겨울 대통령 선물.
60년대. 하인천(인천역) 합승.
60년대 합승(빨간색).
한탕 끝내고 종점에 닿으면 차장(조수)은 손님에게서 받은 요금을 운전수에게 건네주고 운전수는 가방에 돈을 보관하였다.
합승을 구입후,토,일요일에 차를 타고 싶으면 운행노선의 길에서 기다리다가 우리차를 종일 타고 운행종료시 운전수와 같이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차주(車主)집에서 감시하기 위해 보낸것으로 알고 운전수는 내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운행에 관련하여 알기도 했고, 조수인 정진이(서정진.나와 비슷한 나이또래로 친했다)는 이것 저것 운전수의 비리를
내게 말해주기도 했으나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리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차량을 구입하여 처음 채용한 박씨 아저씨는 베테랑 운전수로 나이도 지긋한 분이었다.
매일밤 운행이 끝나면 우리집으로 합승을 몰고와서 밖에 주차를 하고, 운전수는 가방을 가지고 집에 들어와 아버지께 운행일과와 더불어 요금을 건넸다.
어머니는 종일 고생한 운전수에게 매일밤 따뜻한 밥에 생선을 튀기고,이것 저것 반찬과 더불어, 매년 가을이면 집에서 담근 포도주 반주까지
곁들여서 박씨 아저씨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적지않은 돈을 들여 처음 해보는 운수업인만큼 정성을 다한것이다.
60년대 차장의 돈가방.모자.
박씨아저씨는 마당에 들어오면서 현관에 나와 계신 아버지를 보면 항상 멋적게 웃으며 " 오늘,아다리가 안맞아서...." 하면서 말끝을 흐리곤 했다.
내놓는 돈은 항상 7~8천원.적으면 6천여원 그 이상을 넘기지 않았다.
***** 아다리 : 바둑에서 상대의 패를 먹기전에 부르는 경고로 아다리가 맞았다라는 말은 벌이가 좋았다.운이 좋다는 뜻*****
가끔 차가 고장이 나서 운행을 못하기도 하고, 수리를 하느라 돈도 솔찮케 들어가는데, 가져오는 돈은 거의 매일 그랬다.
하루는 박씨 아저씨가 개인사정 때문에 운행을 못하게 되어 스페어 운전수를 쓰게 되었다.
운전수가 급한 사정으로 운행을 못하게 되면 긴급히 스페어 운전수로 하루를 대체시켰다.
밤이 되어 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스페어 운전수는 방에 들어와서 가방을 펼쳐놓는데 12,000원이 넘는 돈을 아버지께 건네드리는 것이다.
보고 있는 우리형제들과 아버지께서는 꺼낸돈을 보고 모두 놀랬다.
나의 어린 마음에도 " 이럴수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40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액수가 잊혀지지않고 있다.
다음날, 박씨 아저씨는 짤렸다.
젊은 스페어 운전수는 정식 운전수가 되었다.
새로 채용한 젊은 운전수도 날이 갈수록 돈이 줄기는 했지만, 박씨 아저씨만큼 적지는 않았다.
그당시 차장과 운전수의 삥땅은 큰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었다.
많은수의 다른 차장과 운전수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경험없이 처음 해보는 운수업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는 속많이 썩으셨다.
광장에는 차량 주행표시도 없고, 리어카도 한몫. 자전거.행인까지 뒤섞여있다.
1960년대중반 서울역 광장. 합승과 전차가 주요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자료출처:한국대관]
그당시 차량은 전부 지입으로,차주가 모든 관리를 하였으며, 운수회사는 노선변경등 행정적인 업무만 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운행을 마친 차는(통행금지도 있던 시절이라, 약 밤10시쯤이면 들어왔던것 같은데...확실치는 않다.)
차주의 집에 차를 주차 하였고, 다음날 아침이면 운전수가 와서 운행을 하였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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